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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하대 지방민의 동향과 구휼과 호족의 등장

신라하대 지방민의 동향과 구휼과 호족의 등장

신라하대 지방민의 동향과 구휼

신라 하대는 한국고대사회의 해체기로서 여러 가지 모순이 노출되었다. 이 시기의 사회문제는 신라사회의 내부에서 발생하여 스스로의 개혁에 한계를 드러내게 되었다. 신라 사회는 제모순을 극복하기 위하여 외부세력의 간섭이나 영향력 없이 스스로의 변화와 개혁를 가져와야 했다. 그러나 그 문제는 신라에 의해서 스스로 해결되지 못하였다. 물론 신라의 지배세력에 의한 노력도 있었으나 폐쇠적인 골품제에 안주한 진골귀족의 반발과 저항에 의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결국 신라 하대의 왕실은 지방민에 의한 반발과 저항에 직면하였다. 농민의 저항으로 결국 삼국통일이 이룩된지 200여 년만에 분열되어 후삼국이 성립되었다. 후삼국은 하나의 국가, 하나의 민족이 분열되어 분립된 국가형태를 갖게된 것이다. 3국의 분립은 국가 상호간 적대적 관계를 형성하여 상호간에 치열한 전쟁과 세력경쟁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백성들이 전쟁에 동원되어 사망하거나 부상을 당하였을 것이며 가혹한 조세징수와 역역을 지는 경제적 부담을 졌다. 신라 하대에 처한 농민의 실상을 살펴보겠다.

신라 하대 지방사회의 동향을 지방에 내려간 진골귀족과 토착농민을 나누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지방에서 진골귀족의 동향을 알려주는 기록을 참고하면 다음과 같다.

-熊川州의都督金憲昌이 그의 부周元이 왕이 될수 없음을 이유로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국호를 長安이라 하고 건원하여 慶雲 원년이라고 하였다. 武珍,完山,菁,沙伐의 4주 都督과國原,西原,金官의仕臣및 여러 군현의 수령을 위협하여 자기의 소속으로 만들었다. (중략) 헌창은 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스스로 죽었다. ……宗族黨與를 주륙하였는데 무룻 239명이었다. 그 백성들은 풀어주었다(三國史記 10, 신라본기 10, 헌덕왕 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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