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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히테(Fichte)에 대해

피히테(Fichte)
I.생애와 사상
1.생애
요한 고트리프 피히테(Fichte Johann Gottlieb,1762~1814)는 독일의 작센지방의 작은 마을 랍메우냐에서 수공업자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공부하기가 어려웠으나 그의 타고난 천재적 기질을 그 지방의 한 부호가 인정하여 그의 후원을 받아 1780년 중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예나대학에 입학하여 신학(神學)을 전공하다가 라이프찌히 재학으로 전학하였다. 그후 추리히에서 요한 란이라는 아가씨와 약혼하였는데 이때부터 그의 생활이 안정되었다.
1790년 라이프찌히 대학에서 칸트철학에 몰두하다가 자유 문제(自由問題)에대한 해결을 얻은 뒤로부터 칸트철학을 연구하게 되었다. 따라서 1791년에는 직접 쾨니히스베르크로 칸트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칸트의 주선으로 계시 비판 (계시비판,Versuch einer Kritik Aller Offenbarung)이라는 종교론(宗敎論)을 출판하였으며 칸트의 ‘이원론’(二元論)통일원리(統一元利)를 발견하여 독자적인 철학을 구상하기도 하였다.
1798년 예나대학의 철학교수로 재직하면서 지식학(知識學)을 강의하였는데 이것은 나중에 그의 주 저서인 전지식학(全知識學)의 기초의 바탕이 되었다.
1798년에는 ‘신(神)을 도덕적 세계로‘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그 유명한 무신론(無神論)논쟁을 일으켜 바이마르 정부에 의해 파면되어 재직4년의 예나대학을 떠나 베를린으로 갔다.
베를린에서 그는 독일 낭만주의의 대가인 슐레겔형제와 술라이에르마하,티에크와 교제를 갖게 되었다.
1805년 에어랑갠대학에서 강의했으나 이때 프랑스 대혁명의 여파가 독일에도 미쳐 1806년 프랑스군대가 독일에 쳐들어오자 퀴니히스 베르크로 피난했다가 1807년 프랑스군대가 점령하고 있었던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여기에서 독일 국민에게 고(告)함 이란 유명한 강연을 함으로써 교육 재건을 부르짖고 독일 국민의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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