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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상으로서의풍수

정치사상으로서의 풍수지리

우리 역사의 흐름 속에서 풍수지리는 과연 어떤 역할을 했고 또 영향을 미쳤을까 오늘날에도 풍수지리에 대한 한국인의 관심은 다소 그 믿음이 옅어지기는 했으나 지대한 것이 사실임을 볼 때 이 문제는 역시 관심을 끌만한 것임에 분명하다.
왕조의 교체기마다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에는 치열한 물리적 대결이 있었고 또 그 이면에는 정신적 이념의 대립이 있었다. 풍수지리 역시 그 대립의 한가운데서 이용되었는데 다음에서 그 과정과 의의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1. 나말 여초의 상황과 풍수지리

風水地理說은 신라의 서울인 金城(경주)에서 중앙 귀족들에 의해 수용되었다. 왕위 쟁탈전을 중심으로 한 진골 귀족들의 세력 다툼 속에서 그들은 부처의 힘과 아울러 땅의 힘까지 빌려 자신의 세력을 보장받으려 하였다. 불안한 정세 속에서 조성된 불안 심리의 작용이라고 하겠다.
그러다가 신라 말기에 지방의 각지에서 호족 세력이 대두하면서, 풍수지리설은 호족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그들은 진골 중심의 신라 사회를 부정하고, 새 세상을 이루려 하였고 각자의 세력 기반인 지방의 우월성을 내세울 필요를 느꼈다. 따라서 풍수지리설은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호족들 간의 대립 구도에서도 역시 풍수지리는 실지의 전쟁과 함께 그 정당성을 인정받는 하나의 통로 역할을 한 것이다. 이 시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이 바로 도선(道詵)이다. 도선은 확실치는 않으나 우리 나라 최초의 풍수가라고 할 수 있는데 그의 생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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