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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한일 관계.

조선 후기의 한일 관계.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일본을 불구 대천의 원수국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과 일본의 강화 교섭은 빨리 진척을 이루어 종전후 수년 후인 1607년 回答兼刷還使를 파견 국서를 교환하여 국교를 재개하였다.

조선의 기록에 의하면 1599년 6월 대마도주 宗義智의 家臣 柳川調信의 명의로 부산첨사 이종성에게 보낸 서계가 강화 교섭을 위한 첫 사자의 파견이었다. 이듬해 2월에도 대마는 사신을 파견하여 덕천가강이 임란을 일으킨 풍신수길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과 和好가 덕천가강의 뜻임을 알리고 160여명의 피로인을 송환하면서 강화를 요청하였다. 조선은 1600년 5월 처음으로 일본에 조선의 입장을 전달하였으며 내용은 임란 때의 침략행위를 꾸짖는 것이었다. 그리고 조선은 명을 핑계하여 독자적으로 강화를 결정할 수 없다는 등의 대답으로 강화를 미루었다. 실질적으로는 조선은 초기부터 독자적으로 조일관계를 전개하여왔고 또 명도 조일관계가 명을 위협하지 않는다면 관여하지 않는다는 기본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1601년 조정에서 일본의 국내 정세 및 계속되는 피로인 송환과 강화 요구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일본에 대한 강화의 문제를 대마와의 許和와 덕천정권과의 講和로 분리하여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대마도는 자손처럼 보살핀지 오래이며 다른 일본의 왜와 다르다 하여 조선 전기와 마찬가지로 羈縻之策을 재개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일본재침설이 나돌고 이에 대한 확인을 위해서 유정 일행이 탐적사로 파견되고 1606년 3월 덕천가강을 만난 유정 일행을 통해 강화의 조속한 타결을 요청하자 조선과 일본의 지리적 여건상 끝내 단교하고만 있을 수 없음을 인식하였고, 덕천가강이 직접 통교를 요청하지 않고 대마도를 통하여 하는 것을 물어 덕천가강의 국서와 犯陵賊을 보내주면 和好하겠다는 강화의 조건을 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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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wp/pdf]조선 후기의 한일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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